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문단 편집) === [[핀란드 내전]] === 1917년 초 휴가를 받아 후방으로 온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혁명|2월 혁명]]과 황제의 몰락을 목격했다. 그해 여름 제6기병군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정부가 자신을 반혁명분자로 간주하자 신생 [[러시아 공화국]]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만네르헤임은 낙마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보직해임을 청했다. 예비역으로서 [[오데사]]에서 요양을 하다 아예 퇴역을 하고 핀란드로 귀국하기로 했다. 명문귀족의 자제이자 몰락했다가 자수성가로 부활했으며 종주국의 군대에서 중장까지 단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우파들에게 우상적 존재였다. 향후 독일이 핀란드를 정복할 때를 대비하여 러시아군 내의 핀란드인 장교들이 1915년에 만든 군사위원회(Sotilaskomitea)라는 사조직이 있었는데, 전쟁이 다 끝나가던 1918년 만네르헤임은 그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30년 만에 핀란드로 돌아온 만네르헤임은 [[핀란드어]]를 새로 배워야 했다.[* 그의 모어는 [[스웨덴어]]였다.] 그는 훈장을 받고 "이제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러시아 황제에 충성했기에 그 황제를 몰아낸 러시아 공화국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향후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하는 대부분의 백군 장군들이 이런 식으로 군벌이 되었는데, 다만 만네르헤임은 돌아갈 핀란드가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만네르헤임이 귀국한 시점에서 핀란드 정치는 개판이었다. 앞서 말했듯 핀란드는 1906년 의회개혁으로 당시 기준 어느 선진국도 하지 못했던 매우 진보적인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핀란드는 러시아 속령이었고, 국가원수인 러시아 황제가 수틀리면 의회는 해산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1917년 2월 마침내 황제가 없어짐으로써 핀란드는 훌륭한 제도를 제대로 한번 굴려 볼 기회를 얻었다. 해산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성장한 정당은 단연 [[핀란드 사회민주당]]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선거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었고, 1916년 3월 총선에서는 다른 정당과의 연정 없이 단독 과반을 달성했다. 이 선거로 성립된 오스카리 토코이 원로원([[핀란드 대공국]]의 행정협의회)은 핀란드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제외한 모든 행정권력을 러시아로부터 회수하고, 그 권력을 원로원이 아닌 의회에 부여한다는 "권력법"을 발의했다. 사회민주당이 단독 과반이었으니 이 법은 당연히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제국 시절부터 종주국이던 러시아 공화국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좌익에 의해 독립이 되면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는 좌익이 국가를 주도할 것을 두려워한 핀란드 우파들은 모스크바의 케렌스키에게 쿠데타를 사주했다. 케렌스키는 핀란드에 병력을 파견해 토코이 원로원을 해산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의석을 얻었고, 나머지 중도-우익 정당들이 다같이 연정하여 겨우 여당이 되었다. 핀란드의 노동계급 사이에서는 거대한 분노가 피어나기 시작했고, 그리고 압도적 제1정당임에도 사회주의가 싫다는 것 외에 아무 공통점도 없는 다른 정당들이 뭉쳐서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니 자신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더해졌다. 이제 의회주의, 민주주의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파 역시 그런 분위기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좌익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네르헤임이 귀국한 것이다. 스웨덴계 귀족으로 법관 출신인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가 러시아군 중장인 만네르헤임에게 핀란드군 대장 계급을 수여해 주었다. 그리고 만네르헤임이 신생국 핀란드 군부의 수장이며 자신들이 조직한 우익 민병대가 군대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좌익 세력과 노동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선포하여 무장봉기했다. [[핀란드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뼛속까지 러시아 [[근왕파|근황주의자]]였던 만네르헤임은 스빈후부드를 비롯한 우파 정치인들이 독일과 유착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일단 독일보다 싫은 좌익 세력과 싸워야 하니 총사령관직을 받아들였다. 핀란드 내전은 앞으로 [[6.25 전쟁]] 등에서 되풀이되는 공산주의 vs. 반공주의 내전에서 발생하는 온갖 끔찍한 일들이 미리 다 벌어진 아수라판이었다. 이런저런 학살 및 수용소에서의 학대로 사망한 피해자 수치는 3.6만 명 정도로, 이것은 핀란드 인구의 1%에 달했다. 좌익과 우익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발생빈도는 6:1 정도로 우익에 의한 전쟁범죄가 압도적이었다. 만네르헤임은 이 전쟁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1918년 2월 25일, 만네르헤임은 포로에 대한 처우를 각 제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쉽게 말하자면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하는 것을 정당화하겠다는 말이다. 이런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다. [[외환죄]]를 근거로 사형을 집행하려면 외국과의 전쟁이 진행 중이어야 한다. 하지만 핀란드 내전은 어디까지나 핀란드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외세의 지원을 받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핀란드 백군은 사로잡은 적군 포로를 외환죄로 사형에 처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외환죄 적용이 가능하게 하려면 방법은 [[계엄령]]뿐이었는데, 계엄령은 러시아 지배 시기 워낙 악용되었기에 민중의 증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빈후부드 원로원은 그런 정치적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고, 적군(reds) 가담자들을 박멸해야 할 "적군(enemy)"이 아닌 "무장한 민간인(armed civilians)"으로 취급했다. 반면 만네르헤임으로 대변되는 군부는 빨리 다 죽이게 계엄령을 내리고 핀란드 적군을 "적국(enemy state)"으로 간주해 선전포고하라고 요구했다. 원로원과 군부의 이런 이해관계의 타협안으로 나온 것이 만네르헤임의 성명이었다. 백군 지휘관이 적군 포로를 죽이거나 해쳤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도주나 반항으로 인해 위협을 받은 백군 측의 [[정당방위]]라는 논리였다. 그래서 포로들을 풀어주고는 "포로들이 도망간다!"라며 등에 총을 쏴 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논리야 무엇이든 결국 핵심은 [[학살]]이었다. [[내전]]의 특성상 [[민간인]]들을 포로와 구분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백군은 그들을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 내전에서 누가 "전사"했다고 하면 그것이 싸우다 죽은 것인지 아니면 포로로 잡혀서 그 자리에서 학살당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후 승세가 백군 쪽으로 기울고 군법회의소가 정식으로 만들어지면서 포로들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포로들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수용소에서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이미 금지된 즉결총살을 당했다. 적군에는 공장 노동자로서 노동조합 활동에 참가한 여성들도 약 2000명이나 참여했다. 이들은 남자 포로들보다 더욱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결국 [[독일 제국군]]이 상륙하면서 수준을 달리하는 독일군의 직접 개입으로 순식간에 내전이 평정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를 몰아내니 이제 독일이 말썽이었다. 독일은 핀란드에 [[빌헬름 2세]]의 매제를 왕으로 꽂아줄 생각이었고, 독일군은 핀란드 내전이 끝난 뒤에도 독일에 머무르며 점령군으로서 내정간섭을 했다. 한편 만네르헤임은 러시아 근황주의자였기 때문에 핀란드만 정리하고 끝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여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핀-러 간 국경을 (당연히 핀란드의 동의 없이)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했다. 조만간 [[춘계 공세|서부전선에 올인]]을 해야 하는데 겨우 잠잠해진 동부전선을 다시 들쑤실 이유가 없었다. 만네르헤임은 자신의 반공십자군(?) 계획이 거부당하자 빈정이 상해서 총사령관직을 내던져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 제국]]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되는 가운데, 만네르헤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원로원이 취한 친독일 정책에 연합군이 보복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과 거리를 두기 위해 1918년 6월 스웨덴의 문중을 방문한다는 핑계로 튀었다. 1918년 10월, 독일의 압력을 받은 원로원과 의회는 빌헬름 2세의 매제 [[프리드리히 카를|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공자]]를 핀란드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불과 1달 뒤 독일이 [[춘계 공세|서부전선에서 패하면서]] 핀란드의 독일군도 철수하고, 헤센 공자도 왕위를 포기했다. 그러자 만네르헤임은 [[스톡홀름]]에 주재하는 [[협상국]] 외교관들을 만나고 다니며 자신은 원로원의 정책에 반대했고 협상국을 지지했다고 변명했다. 12월에 핀란드로 소환된 만네르헤임은 스빈후부드의 후임 국무섭정으로 선출되었다. 핀란드를 [[핀란드 왕국|왕국]]으로 만들기로 했는데 왕이 증발해 버린 상황이니, 훗날의 [[호르티 미클로시]]처럼 일단 [[섭정]]만 있는 왕국을 만든 것이다. 이 때 몇몇 군주주의자들이 만네르헤임에게 왕이 되라고 청했지만 만네르헤임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거부했다. 공화국 여론이 강한데 독일이 억지로 만든 왕국이었다. 게다가 해외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협상국이 승리했다. 이 시점에서 핀란드의 왕관은 독이 든 성배도 아니고 그냥 독약이었을 뿐이다. 만네르헤임은 그런 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센스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